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혼마 마사하루 (문단 편집) == 상세 == 혼마 마사하루는 1888년 1월 28일에 [[니가타현]] [[사도 섬]]에서 태어났다.[* 혼마 가문은 [[가마쿠라 막부]]시절부터 사도 섬을 다스리던 가문으로, [[우에스기 카게카츠]]의 침공으로 통치에서는 손을 뗐지만, 여전히 사도 섬과 니가타의 유력 가문으로 남았다. 유명 골프 브랜드 '혼마'를 창립한 가문이기도 하다.] 1907년 육군사관학교 19기를 거쳐, 1915년 육군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. 이후 8년간 영국의 대사관 주재무관으로 있으면서 유창한 영어를 익혔으며, 프랑스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참관하기도 했다. 1930-1932년에 혼마는 다시 영국에 무관으로 파견되었고, 1932년에 제네바 군축협상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었으며, 육군성의 대변인으로 일했다. 1933-1936년에는 야전으로 파견되어 여단장을 맡았다. 1937년 혼마는 쇼와 천황의 동생이었던 지치부 친왕의 부관으로 임명되어 유럽을 여행하였다. 이 여행은 독일과 일본의 외교관계를 증진시키려는 목적이었고, 그는 독일에서 [[아돌프 히틀러]]를 만나기도 했다. 1939년에는 중국 [[톈진]]에서 일본군 사령관을 지냈는데, 이때 일본 육군은 이 지역에서 외국조계를 봉쇄하고 있었다.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있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육군 중장이었던 그는 일본군의 필리핀 군도 침략을 지휘했다. 그러나 바탄과 코레히도르에서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진 이후부터 [[야마시타 도모유키]] 장군으로 교체되었다는 추측이 일반적이지만, 이후 조사된 증거에 의하면 필리핀 군도에 대한 침략전쟁의 전 기간에 걸쳐 혼마가 최고 사령관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. 또한 비사야 제도와 민다나오 제도에 산재해 있던 미국 군대와 필리핀 군대에 대한 소탕작전을 지휘하기도 했다. 17만에 가까운 병력으로 11만의 미군+필리핀군 연합군의 지연전에 휘말려 만주, 싱가포르 등에서 5만여 명의 증원이 오고 나서야 겨우 방어선을 돌파해 웨인라이트의 항복을 받았다. 여기까지는 그냥 일반적인 군인으로 보이나, 문제는 그가 [[츠지 마사노부]]와 함께 [[바탄 죽음의 행진]]의 장본인이라는 것이다. 필리핀에서의 확전으로 예비역으로 예편된 후에는 군에 등용되지는 못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